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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뉴스

유네스코 뉴스 입니다.
인터뷰 | 유네스코는 한국 해양학 발전의 큰 동력이었습니다
등록일 2020-09-04

허형택 전 IOC/WESTPAC 의장 및 한국해양연구원장

유네스코는 한국 해양학 발전의 큰 동력이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대륙과 이어져 있는 북쪽으로는 사실상 왕래가 어려운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바다를 연구하고 바다를 통해 세상과 교류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였다. 유네스코는 한국이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교차하는 우리 바다를 상세히 파악하고 개발과 공생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1960년대 한국해양학위원회(KOC) 설립을 비롯해  한국이 유네스코와 함께 해양과학 발전에 매진하던 시기에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과학 담당 간사로 근무했던 허형택 전 IOC 서태평양위원회(IOC/WESTPAC) 의장을 만나 보았다.


유네스코는 과학 분야에서 해양학을 전담하는 기구로 정부간해양학위원회(IOC: Intergovernmental Oceanographic Commission)를 두고 있습니다. 

한국도 여기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해양학 분야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1960년 창설된 IOC에 우리나라가 1961년 7월에 가입하면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이하 한위)는 IOC의 국내 기구인 한국해양과학위원회(KOC, 현 한국해양학위원회)를 설치하게 됩니다. KOC는 당시 해양학 불모지에 불과했던 국내에 해양학을 도입·발전시키기 위해 해양 관련 인재를 발굴하고 IOC 훈련과정, 세미나, 심포지움을 통해 이들의 역량 강화를 돕는 한편, 정책 및 학술분야의 국제회의 참여 기회도 제공했습니다. ‘해양’이라는 말조차 낯선 당시 국내 실정에서 해양 관련 학자나 전문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부산에 있는 국립수산진흥원과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에서도 주로 어류나 수산에 대한 조사나 연구를 하는 정도에 그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제가 1961년 한위의 과학담당 간사로서 처음 했던 일이 국내 해양 관련 학자들의 명단을 만들고, 그 중 KOC가 선발한 후보자가 해양학 훈련과정, 심포지엄, 국제회의 등에 참석하도록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KOC는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진행된 쿠로시오 해류 국제 공동조사(Cooperative Study of Kuroshio and Adjacent Regions, CSK)에 국내 학자들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선진국 중심으로 진행되던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 국내 해양학자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한 KOC는 1965년에 한국해양학회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듬해 7월 한국해양학회를 창립했습니다. 해양학회 창립 이후인 1968년에야 서울대학교에 국내 최초의 해양학과가 설치돼 해양전문가 양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 불모지와도 같던 국내 실정에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한국 해양과학의 모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형택 박사는 1961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 입사해 과학담당 간사로서 국내 해양학자의 발굴과 역량강화, 한국해양학회 창설을 이끌었고, 

IOC 서태평양위원회(IOC/WESTPAC) 의장 및 한국해양연구원(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원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의 해양과학 발전에 기여했다. 

 

자연과학 분야가 굉장히 다양한데, 유네스코에서 해양과학 사업이 중요하게 다뤄졌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가 해양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 큰 배경이었습니다. 고갈되는 육상자원을 대체하기 위해 해양자원을 개발하고, 환경을 보전 관리하며 기후변화를 예측 조절하기 위해 국제적인 해양탐사 연구 사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유네스코는 처음에 해양과학국(Marine Science Division)을 두어 해양탐사사업을 시작해 세계 5대양 국제탐사 및 관측 프로그램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잘 관리하기 위해 IOC라는 기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2차대전 당시 군사 목적으로 개발됐던 잠수정, 음파탐지, 해양관측 및 해저탐사 기술 등을 해양관측 탐사에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해양 개발을 하는 추세가 지속되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이처럼 해양학 연구와 관련한 수요가 계속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해양 사업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박사님께서도 해양과학분야를 공부한 것이 연이 되어 한위 및 유네스코에서의 활동으로 이어진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산수산대학교에서 해양생물학을 전공하고 수산과학원에서 근무하고 있던 저에게 한위에서 먼저 연락을 해 왔습니다. 당시 한위는 유네스코 해양과학 사업에 대응하기 위해 해양과학분야 전문가를 찾고 있었으니까요. 그 연락을 받은 뒤 우선 부산에서 영어학원을 다니며 영어공부를 했고, 서울에 와서 인터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한위에 입사하게 되어 5년 정도 근무한 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유학을 했습니다. 그 시작은 1966년에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3개월간 덴마크에서 개도국 해양학자 연수훈련과정에 참가한 것이었습니다. 이 연수가 저에겐 큰 전환점이었고, 이런 기회를 준 유네스코에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1965년에 열린 ‘쿠로시오 조사를 위한 해양과학 심포지엄’ 현장 모습. 유네스코의 도움으로 

참여한 이 사업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은 한국이 해양학 분야에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한위를 거쳐 해양전문가로서 KOC 위원장, IOC/WESTPAC 의장 등 여러 활동을 하시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제가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IOC 활동에 대한 기억이 많습니다. 저는 IOC 총회 및 집행이사회에 1982년부터 2008년까지 26년 동안 매년 참석했습니다. 이를 통해 다른 나라 대표들을 잘 알게 되었고 좋은 관계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1993년 IOC 집행이사회에 참석했을 때의 기억은 특히나 남다릅니다. 당시 IOC 회원국 160여 개국 중에서 30여 개국을 집행이사국으로 뽑는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집행이사국이 되었습니다. 당시 동남아의 국가들과 이란, 인도, 북한도 후보로 나왔었는데 우리나라는 30표 이상을 얻었습니다. 이후 우리나라는 현재까지도 연속으로 집행이사국으로 선출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해양과학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발전에 비견할 만큼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과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큰 추억입니다. 1960년대 초 KOC 설치로 해양학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국내 해양학자들은 석·박사학위 과정과 전문가 훈련을 미국 등 해양선진국에서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한국은 동남아 등 개도국 젊은 해양과학자들에게 교육훈련을 제공하는 해양기술 이전국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인력과 조사선, 연구 장비 등 시설면에서 명실공히 세계 상위의 위치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이제 한국 해양학자들이 IOC, WESTPAC, PICES(북태평양해양과학기구)등 국제기구의 의장으로 선출되는 등 한국은 해양학 분야 국제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해양과학 발전사에서 유네스코의 활동은 어떤 역할과 기여를 했다고 보시는지요?

유네스코는 황무지에 불과했던 한국의 열악한 지평 위에 해양학의 씨를 뿌리고 가꾼 후견인 역할을 했습니다. 유네스코의 독려로 우리나라는 매우 열악한 연구여건과 일천한 경험 등에도 불구하고 1965년부터 5년간 이어진 쿠로시오 국제공동조사(CSK)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선진 해양연구 방법 및 연구 기술을 축적하게 되었습니다. 유네스코의 꾸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분야보다도 학자 훈련 및 양성, 학회 설립 등에 더 큰 박차를 가할 수 있었고, 100년 정도의 역사가 있는 해양학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서 단기간 내에 그 수준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현재 한국의 해양과학은 지난 50년간 명실공히 세계 상위권으로 발전했습니다. 연구기술분야에 있어서는 개도국 젊은 해양과학자들을 초청하여 중단기 해양과학 훈련 교육을 실시하는 기술 수출, 즉 공여국으로 도약했으며, 장비나 조사선 등 시설분야에 있어서는 대형 첨단해양조사선, 예를 들면 1420톤의 온누리호, 5900톤의 이사부호, 7500톤의 아라온호 등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조사 영역이나 범위에 있어서도 연안이나 연근해 조사에서 그쳤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5대양을 포함한 세계 전 해역, 남·북극해 조사를 비롯해 천해에서 수심 1만 미터 이상 심해에 이르기까지 탐사 가능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한국이 유네스코에 가입한 지 올해로 70년이 되었습니다. 한국과 유네스코가 지금까지 함께 해 온 70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방향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세상이 변하면서 각 분야마다 전문적인 기구들이 생기니 우리가 할 역할은 점점 줄어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유네스코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기구로서의 역량을 펼치는 데도 예전에 비해서 어려움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우리나라 해양과학 시스템 및 역량을 바탕으로 정부 차원에서 지속적인 원조 및 공여를 진행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유네스코를 통해 해양과학의 발전을 이룩했듯, 우리나라도 해양과학 발전에 대한 수요가 있는 개도국에 같은 방식으로 베풀어야 됩니다. 해양에 둘러싸인 자연환경을 적극 활용하여 산업발전과 경제성장을 일구어 낸 한국은 해양수산부를 독립된 부처로 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입니다. 선진국의 공적개발원조(ODA)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된 한국은 2019년 기준 100억 원이 넘는 해양수산분야 ODA사업을 통해 개발도상국과 군소도서국의 해양개발, 환경보전, 역량강화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대외협력기금을 활용하여 유네스코를 통해 동남아, 중남미, 아프리가 개도국들의 해양인력 개발과 역량강화 및 연구시스템 개발 지원 확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IOC 사업 활성화에도 의미가 있을뿐 아니라, 이를 통해 한국의 국가적인 위상도 높이고 우리가 세계의 바다에 진출하는 창구도 더 넓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과학청년팀 김은영 팀장, 최연수 전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