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지 희망 스토리] 아프리카 3개국에서 날아온 전문요원들의 첫 편지 2015-08-10 (조회수 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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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으로 선발된 유네스코 브릿지 전문요원 3인이 지난달 한국을 떠나 각기 맡은 아프리카 지역에 도착했다. 기나긴 여정에 짐이 분실되는 등 갖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모두가 건강하게 자리를 잡고 도착 1신을 보내왔다. 앞으로 아프리카 교육 지원 현장과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사이에서, 그리고 브릿지 활동가들과 현지 주민, 수많은 후원자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희망의 다리’가 되어 줄 각 전문요원의 편지를 소개한다.
도착 후 벌써 3주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사실 이곳에서 혼자 살 집을 구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맘 좋으신 호주 아주머니와 집을 나눠 쓰게 되었습니다. 소박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 는 새 터전이 마련되었어요. 저의 올해 프로젝트 성격상 잠비아국가위원회가 아닌 협력기관의 사무실을 주로 쓸 예정입니다. 차츰 현지인 동료들과 점심시간에 어느 식당에 가면 싸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 수다도 떨며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적응기’에 접어든 상태이지요. 이곳에는 브릿지 아프리카 프로젝트가 수행되는 세 곳의 사업장이 있습니다. 수도 루사카를 중심에 두고 거의 1시간~3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치시코와 솔로본, 그리고 올해 저희의 중점 지원 지역인 네가네가 (Nega-Nega) 마을입니다.
지난 주에는 네가네가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다른 아프리카의 나라들처럼 이곳 역시 수도에서는 교통 체증이 매우 심각해, 아침 일찍 출근시간을 피해 출발해야 했습니다. 가는 길에 도로 공사 현장과 새 공장들이 들어서고 있는 마을들을 보며 “최근 5 년 사이 잠비아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길에는 거친 길바닥에 자동차 타이어가 견디지 못하고 펑크가 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어가는 하늘 아래서 차 타이어를 힘들게 갈아 끼우는 운전사 아저씨를 보며, ‘아… 이제 시작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역시 녹록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란 생각으로 힘을 내겠습니다.
올해 이곳에서 제일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네가네가 마을의 문해강사 양성센터 증축입니다. 건축 일이 만만찮은 것이라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지만 잠비아국가위와 협력기관 등과 잘 협력해 ‘아래에서부터의 변화’ 를 이끌어낼 수 있는 거점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운동이나 건강관리에 소홀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항상 명심하고 있습니다. 네가네가 마을에서 쓰는 통가어로 ‘감사합니다’ 를 말씀드리며, 다음 편지를 기약할게요. “투아룸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말라위의 수도 릴롱궤는, 제가 예전에 활동했던 케냐보다 오히려 더 깨끗하고 더 푸른 모습입니다. 인구밀도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편이라는데 사람들로 빽빽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나이로비(케냐의 수도) 시내가 한국의 명동처럼 사람의 물결로 넘실거렸지요. 하지만 이곳 역시 해외에서 들어올 자본과 함께 개발의 물결을 탈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조금 슬퍼집니다. 이 나무들과 숲들도 곧 없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물가는 극과 극입니다. 방세도, 각종 사무용품 값도, 말도 안 되는 낮은 가격과 입이 떡 벌어지는 높은 가격이 있을 뿐 중간이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중산층이 거의 없으며 국내 시장이 작고 산업으로 자생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자원들은 모두 수출이 되고, 그 이익은 다양한 이유로 국민들에게 돌아가지 않는 거죠.
하지만 찬찬히 보면 이곳 또한 사람 사는 동네입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주변에 있는 사무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 곳이 있습니다. 흔들거리는 간이 화로에 옥수수를 구워 파는 아저씨가 있는 곳. 유네스코에서 일하건 적십자에서 일하건 아이들 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이건, 다들 모여 옥수수를 하나씩 뜯는 곳입니다. 저마다에게 그 옥수수는 점심이기도, 간식거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옥수수 알이 부드러운지 확인하는 손길은 같습니다.
인천에서 열린 2015 세계교육포럼에 참여한 말라위의 교육 관계자인 데이빗씨는 한국의 교육 발전사를 듣고 보고 희망에 가득 찬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한국 교육에도 문제가 많아요” 하는 제 얘기는 일단 나중에 듣자고, 난 이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제 아버지 역시 60년 전 땡볕 아래 흙바닥에 앉아 나무판에 글씨를 적어가며 공부를 하던 그 한국 아이들 중 하나였다고 이야기해 주자, 그의 눈은 더 반짝이고 얼굴은 더 환해집니다. “우리 말라위 아이들에게도 희망이 있는 거네!” 하는 그에게 “네, 그래요!” 라고 말하는 나. 한국과 제가 순간 그에게 어떠한 ‘상징’이 되었음을 느끼자 어깨가 더 무거워집니다.
6년간 네 번째로, 이곳에 다시 돌아온 제게 한국의 몇몇 친구들이 이렇게 묻곤 합니다. ‘고향에 돌아간 느낌이겠지?’ ‘이제 한국이 더 어색하지 않아?’ 한국과 달리 개발 속도가 늦은 이곳이기에 당장에 뭔가 변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익숙한 그리움들과 ‘당연히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편안함이 동시에 찾아 드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무리 익숙해진 곳이라지만, 그래서 현지어(세소토)를 열심히 하고 지역문화를 이해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이곳 사람들에게 제가 중국인으로 비춰지곤 합니다. 불편한 시선과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도 여전히 많습니다. 그럴 때 마다 마음속으로 되묻습니다. “나는 왜 다시 이렇게 레소토 땅에서 일을 하고자 하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이자 확실한 목표를 주는 그들말이죠.
활동가 신분으로 지낼 때는 지역 마을에서 제 일상과 삶을 함께 나눴던 이웃들이 큰 원동력을 주었습니다. 반면 코디네이터이자 전문요원인 제게 지금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현지 국가위원회 직원들과 교육부 관계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저는 잘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이 아니라, 함께 손잡고 이 땅의 발전을 위해 힘쓰는 동료이자 친구이자 동생이자 후배인 ‘아우씨 디네오(언니 디네오)’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인연을 만들어 나가는 것 이상으로, 협력기관 관계자들과의 인연이 필요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우리 활동가든 전문요원이든, 한국을 대표해서 온 우리들은 언젠가 이 땅에서 떠날 사람 들이고, 그 후에 궁극적으로 우리가 매듭짓거나 해결할 수 없었던 부분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국가 내 리더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향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지역주민들 스스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어 나가는 것. 이를 위한 첫 걸음을 이곳 레소토의 국가 리더들과 나란히 맞춰 나가기 위해, 밖에서 보기에는 조금은 더뎌 보일 수 있지만 올 한 해도 열심히 브릿지 프로젝트를 수행하리라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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